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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할 수 없는 마음으로 괴로운 사람에게 진정 필요한 것

세상에는 겪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마음의 고통도 그렇습니다. 분명 내 마음인데 마음처럼 되지도 않고, 이렇게나 괴로운데 나를 이렇게 만든 게 무엇인지 몇 마디로 간단히 일축할 수 없을 때가 많지요. 그리고 여기, 우울증을 진단받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고통과 마주한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 NHS 정신과 의사 벤지 워터하우스의 회고록 《어떤 마음은 설명되지 않는다》입니다.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가 어쩌다 우울증에 걸린 걸까요? 그 설명할 수 없는 괴로움 앞에서 그는 어떤 행보를 보였을까요? 그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환자들까지, 마음의 병을 견디는 평범한 얼굴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사연이 숨어 있을까요? 웃음과 눈물, 감동과 해학이 교차하는 정신 병동의 드라마를 이 책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정신 질환을 '극복'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모호한 고통을 '이해'해보기를 권하지요. 그것은 우울증, 조현병, 양극성 장애, 인격 장애 같은 진단명에 가려진 각자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서로를 연민하고 아주 작은 진전에 박수를 보내는 인간애와 맞닿아 있습니다. 삶의 복잡성과 인간 내면의 모호함을 조금 서툴러도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저자와 환자들의 노고가 애달프면서도 애틋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정신과 의사로서, 아들로서,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불완전함 앞에 절망하는 벤지에게 심리분석가 조지프가 건넨 불가사리 우화를 여러분에게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마음으로 괴로운 사람에게 진정 필요한 건, 전지전능한 구원자가 아닌 이 고통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주는 또 다른 누군가일지도 모릅니다.노인이 해변을 걷고 있었어요. 만조 때 밀려온 불가사리가 모래사장에 잔뜩 널려 있었는데 한 소년이 그것들을 집어 바다에 던져 넣어주는 것이 보였지요. 노인이 소년에게 뭘 하는지 묻자 소년이 말했죠.'이 불가사리들을 구해주고 있어요.'노인은 웃으면서 말했어요.'얘야, 불가사리는 수천 마리고 넌 혼자인데 이렇게 한다고 누굴 얼마나 구하겠니?'소년은 불가사리 한 마리를 더 집어 바닷물로 넣어주며 대답했지요.'저 녀석은 구했죠.'

타인의 역사를 빌려 우리의 질문을 던져보는 일

《바람의 검심》이 처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만화책을 넘기며 ‘막부 말기’, ‘메이지 유신’ 같은 단어를 처음 접했죠. 사무라이들이 여전히 칼을 들고 목숨을 걸던 시대. 화려한 검술보다는 그 혼란과 격동의 분위기에 더 끌렸던 것 같습니다. 이후 《료마전》 같은 드라마를 보며 ‘근대 일본’이라는 배경에 점점 매료되었습니다. 근대화,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패망까지, 한 나라가 이 모든 것을 100년 안에 겪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를 단순한 드라마나 만화의 배경이 아닌, ‘역사’로 읽으려 하니 마음 한켠이 답답했습니다. ‘일본은 어떻게 그런 도약을 이뤘을까’, ‘그때 조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같은 질문들이 생겼지만,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서울대 박훈 교수님의 연재를 접했고, “이건 반드시 책으로 묶어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잃어버리는 것들

《납작한 말들》을 편집하는 동안 자꾸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납작한 말들’이 제가 겪었던 일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죠. 가령 “어쩌라고? 넌 친구도 없잖아”는 제가 실제로 학창 시절에 들었던 말이기도 했습니다. 급식을 먹을 때마다 자꾸 툭툭 치는 아이에게 항의하자 저에게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친구가 없을수록 반에서 서열이 낮다는 것이고, 서열이 낮은 아이에게는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인식의 표현이었을 겁니다. 영화를 좋아하고, 자전거 타는 걸 좋아하고, 《호밀밭의 파수꾼》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저의 다른 특징들은 ‘친구가 없는 아이’라는 정의와 함께 납작하게 찌그러졌습니다.반대로 제가 타인을 납작하게 찌그러뜨린 경험들도 생각이 났습니다. 면접장에서 다른 경쟁자들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에 따라 안심과 불안을 오가는 에피소드도 제가 실제로 경험한 일이거든요. 그 지원자들에게는 수많은 삶의 맥락이 있겠지만, 저에게는 그들이 ‘어느 대학 출신 경쟁자’로만 인식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친구의 숫자’와 마찬가지로 ‘출신 대학’이 사람의 급수를 나누는 잣대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겁니다.이 책의 프롤로그 제목인 ‘살아남기 위해 잃어버리는 것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봅니다. 저자 오찬호의 말대로 우리는 극단적인 경쟁 사회에서 생존에 도움 되지 않는 것들을 차단해버리며 살아왔습니다. 인문학 공부,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적 사유, 주류에서 벗어난 상상력 등은 가급적 외면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나아가 생존주의와 능력주의를 모든 일을 평가하는 잣대로 삼았습니다. 서열이 낮은 사람은 당연히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납작한 생각’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요? 풍성하고 입체적인 우리의 삶이 이렇게 납작해져도 괜찮은 건가요? 《납작한 말들》을 읽으며 모두가 납작해지는 아포칼립스에서 벗어나 타인의 입체적인 삶을 상상해봤음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도서관과의 첫 만남이 기억나시나요?

여러분은 도서관과의 첫 만남이 기억나시나요? 저는 생생합니다. 안국동에 있던 할머니 댁을 갔는데 주변에 놀 만한 곳이 정독도서관뿐이었어요. 동생과 함께 한참을 뛰어다니다가 땀도 식힐 겸 어린이실에 구경 삼아 들어갔는데 정신 차려보니 네 시간이나 지나 있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마주한 기분이었습니다. 해리 포터가 9와 4분의 3 승강장을 지나 처음 호그와트행 급행 열차에 몸을 실었을 때, 루시가 낡은 옷장 문을 열고 나니아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처럼 말이지요. 그렇게 제 삶은 바뀌었습니다. 무언가를 읽고 쓰고 질문하고 상상하는 재미에 홀려버렸어요. 도서관에 스며들고 만 것이죠.그로부터 대략 25년이 흐른 지금, 저를 다시 한번 '도며들게' 한 책을 냈습니다. 초대 서울도서관장 이용훈, 도서평론가 이권우, 천문학자 이명현, 펭귄각종과학관장 이정모 저자의 신작 《그래서 우리는 도서관에 간다》입니다. 네 분 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서관 생활자'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살아온 환경도, 활동 영역도 저마다 다르지만, 도서관을 만나 읽고 쓰는 사람으로 성장했고 지금도 그 주위를 공전하며 살고 계시니까요.《그래서 우리는 도서관에 간다》는 도서관 생활자 4인방의 도서관에 관한 노변정담입니다. 종로도서관에서 책으로 '놀던' 소년 이명현, "책을 통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좋아서" 사서의 꿈을 품은 학생 이용훈, 원형 도서관에 앉아 온갖 책을 섭렵하며 인문학적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청년 이권우, 독일 본시립도서관 사서들의 집념 어린 권유로 읽은 책들이 계기가 되어 첫 책을 쓰게 된 신인 작가 이정모의 이야기는 도서관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절감하게 하지요.그런가 하면 《코스모스》 '은하 대백과 사전' 개념을 설명하면서 도서관을 '인류 문명의 중간 기지'라고 명명하고,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지켜낸 시민적 연대의 뿌리를 도서관에서 찾기도 합니다. 오직 종이책 서가에서만 가능한 지식의 '우연한 발견'이 AI 시대에 필수적인 '새로운 질문'을 배양한다는 역설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도서관에서 책 읽는 '무상의 독자'가 지갑을 열어야 출판도 존재한다는 일갈은 독서 생태계에서 도서관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새삼 일깨우더군요.저자 네 분들의 유쾌하면서도 진솔한 대화를 따라가면서 든 생각이 있습니다. '도서관을 향한 고민과 애정에도 얼굴이 있다면 이토록 다양하고 깊이 있는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지요. 이 책은 단순명료한 한마디로 일축할 수 없어서 더욱 가치 있는 책입니다. 기술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과 자본의 논리가 우세하는 시대에 어떻게 해야 도서관이 메마른 정서의 목을 축이고 다양한 생각의 씨앗을 움트게 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지를 두고, 네 명의 저자가 무궁무진한 아이디어 배틀을 벌이거든요. 책과 도서관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을 초대합니다, 도서관 생활자들의 치열한 노변정담의 현장으로요. 벌이거든요. 책과 도서관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을 초대합니다, 도서관 생활자들의 치열한 노변정담의 현장으로요. 

어른이 되어서도 문해력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거 아시나요?

Y는 유달리 활달했습니다. 잘 웃고, 이야기가 많아서 쉬는 시간마다 시끌시끌했지요. 친하진 않아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했지만, 말주변이 없던 저는 내심 Y가 부러웠던 것 같습니다.그런 Y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는 시간이 있었으니, 바로 국어시간이었습니다. 지목된 학생은 일어나서 교과서 지문을 읽어야 했죠. “오늘은 5일이니까 5번, 그 뒷사람 일어나.” 국어 선생님의 지시에 쭈뼛거리며 일어난 Y는 천천히 국어책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러다 Y의 입에서 ‘꾹찍꾹찍’이라는 발음이 튀어나왔습니다. ‘굵직굵직’을 잘못 읽었던 거예요. 터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어찌어찌 지문을 끝까지 읽은 Y는 벌게진 얼굴로 자리에 앉았습니다.《문해력 격차》를 편집하며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대로라면 Y는 ‘소릿값’을 제대로 모르는 아이였던 것이지요. 잘 읽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우리는 비웃었고 선생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벌써 30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요즘은 달라졌을까요? 한때 ‘교실에서 한 명씩 교과서를 읽게 하면 잘 못 읽는 우리 아이가 주눅 드니 하지 말아달라’는 학부모 민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그 부모는 아이가 자라면서 자연스레 잘 읽게 될 거라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문해력은 때가 되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문해력이 부족한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요. 아이가 잘 읽는지, 제대로 읽는지 세심히 살피고 잘 읽어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 부모와 사회의 역할이라고 《문해력 격차》의 저자들은 말합니다.어른이 되어서도 문해력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거 아시나요? 내가 잘 읽고 있는지, 제대로 읽고 있는지 스스로 살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숏폼에, SNS에, 멀티태스킹에 집중력을 도둑맞을 때 문해력도 함께 도둑맞았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요. 퍼뜩 불안감이 엄습했다면, 잃어버린 문해력을 되찾고 싶다면, 《문해력 격차》를 읽어보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