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모든 것을 매개하고 있는 이 시점에, 오프라인을 지향하는 마음
25-05-21
얼마 전, 오랜만에 지하철에서 이어폰도 빼고, 동영상이나 웹툰을 보지도 않고 그저 앉아 있었습니다. 옆 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어요. 한 할아버지가 화를 내며 제가 있는 칸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쌍욕을 하며 두리번거렸지만, 시비를 걸 사람을 찾지 못하고 다시 옆 칸으로 이동했습니다. 아무도 그 할아버지를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들 이어폰을 꼽고 화면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할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몇 사람과 제가 전부인 것 같았어요. 승객 대다수는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할아버지가 주는 불쾌함을 애써 피하고 있었습니다. 중립적인 무관심의 표정을 띈 채로요. 그렇지만 만약 할아버지가 제게 시비를 걸어왔다면 누가 말려줄 수 있었을까요? 아니, 할아버지가 시비를 거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을 요청하는 중이었다면 누가 나섰을까요? 저는 익숙한 고립감을 느꼈습니다. 한 공간에 있지만 서로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면,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경험의 멸종》에서 저자인 크리스틴 로젠은 이런 현상을 장소의 소멸로 설명합니다. 우리를 연결해주던 공간은,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경험들-대면 상호작용, 손으로 쓰고 그리는 것, 기다림의 순간, 감정을 느끼는 것, 쾌락을 즐기는 일-과 마찬가지로 점차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 사라진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건 디지털 기술입니다. 우리는 챗GPT에게 문서 요약을 맡기고, 비대면 미팅 플랫폼을 통해 소통하고, 소셜 미디어에 실시간으로 일상을 업로드합니다. 실제로 어디에 있느냐보다 어떤 웹상의 공간에 접속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해졌죠.
이 책을 읽다 보면 잠시라도 오프라인으로 있고 싶다는 마음이 커집니다. 물론 이 책이 디지털 디톡스를 권하기 위한 책은 아닙니다.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도 작금의 디지털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기술이 모든 것을 매개하고 있는 이 시점에, 오프라인을 지향하는 마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자는 아직 직접 경험의 멸종을 막기에 늦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저항은 더 어려워질 겁니다. 마치 핸드폰에 줄이어폰을 꽂을 구멍이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요. 기술을 통해 얻은 것들에 집중하느라 디지털 기술로 인해 잃어버린 현실에 주목하지 못했다면, 이 책이 우리가 상실한 것을 회복할 첫 걸음이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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